조아툰 김규삼, <만렙소녀 오오라> - 어이, 그만둬. 상대는 『Q3』이다ㅡ 무료웹툰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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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삼, <만렙소녀 오오라>
- 어이, 그만둬. 상대는 『Q3』이다ㅡ
▲ 응~ 아니야~
나는 김규삼의 만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현실의 모순을 비틀어 짜낸 몇 방울의 시리어스함을 개그 속에 억지스럽지 않게 배합할 줄 아는 특유의 유머감각 때문이다. 이는 <입시명문 사립 정글고등학교>에서 이미 베스트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버프소녀 오오라>의 2부 격인 <만렙소녀 오오라>에서는 그러한 유머감각을 이어가면서도 조금은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세이브 원고들에게 “X”를 눌러 조의를 표시합니다.
김규삼은 작중 오오라의 입을 빌려 이 만화의 탄생 비화에 대해 설명한다. <만렙소녀 오오라>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컷툰 서비스의 ‘마루타’가 되어야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나의 ‘전지적 궁예시점’에서 보았을 때는 망한 척하는 컨셉으로 웃기는 만화를 기획했으나 시원찮은 반응으로 세이브 원고가 엎어져버리면서 시작과 동시에 진짜로 망해버렸다!
그러나 ‘이왕 망한 만화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의 전개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1부 <버프소녀 오오라>에서 악당 역할을 맡았던 영진이 의도치 않게 ‘영구 슴버프’에 걸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슴이 달린 남자 악당’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 지점부터 작가는 일말의 논리적 서사진행을 포기한 셈이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이 만화의 메인 스토리는 영진의 정체성 혼란(?)과 그 혼란의 극복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실질적 주인공이 오오라에서 영진으로 넘어오게 된다.
▲ 앞으로 자신이 겪어야 할 수치를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영진
그러나 ‘그냥 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작품은 가슴처럼 희화화하기 손쉬운 소재들과 자신의 작품들에서 이어져오는 ‘자본가’ 코드(정안봉 이사장과 불사조, 오오라의 건물주 설정) 등을 반복하는데서 느낄 수 있듯이 결정적인 뭔가가 없었다. <버프소녀 오오라>에 이어서 본작 역시 애초에 작가가 어떤 작품을 그려야겠다는 전체적인 설계도 없이 뛰어들었기 때문에 매 회마다 쪽대본식의 단발성 전개와 개그로 끌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 진짜 망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김규삼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놓고 “하이브 어시비를 벌려고 그린다”든가, “매 회마다 똥만 싸다 끝나는 만화”를 그려보겠다든가는 식의 대사를 등장인물과 오너캐를 통해 보여준다. 아아 이젠 정말 끝이야...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어...!
▲ 이 자식이...?!
2. 메타발언의 적극적 활용
이 만화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봐야할 지점은 캐릭터의 ‘메타발언’을 통해 어떤 효과가 일어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메타발언이란 캐릭터가 작품 내부 세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만화를 보고 있는 상황인 실제 현실, 즉, 자신이 속한 세계보다 상위 차원의 세계를 인식하여 말하는 방식을 뜻한다. <만렙소녀 오오라>에서는 이러한 메타발언이 수도 없이 일어나며, 아예 이 만화의 거의 모든 중요한 전개가 메타발언에 의해서 일어난다.
메타발언은 일종의 규칙위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원래 만화 속 캐릭터는 만화 세상의 규칙과 인과성에 의해서 움직여야 한다. 만화 속 비현실적 캐릭터의 존재는 독자 몰래 은폐된 ‘만화 속 비현실성’에 의해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함부로 캐릭터가 현실 세계를 인식 및 간섭하게 된다면 독자는 만화 세계를 낯설게 보게 되고, 작품 세계를 지탱하는 비현실성이 현실과의 접촉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 이보다 경제적인 컷 낭비를 본적이 없다
천재노창이라는 랩퍼는 ‘Indigo Child’에서 “난 체계가 싫어, 사회도 싫고 규칙이 싫어, 박자도 싫어”라고 말한다. 김규삼은 작품 내에서 이러한 메타발언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만화라는 표현의 규칙으로부터 도망친다. 캐릭터의 대사를 통해 한 컷 만에 몇 달치 분량을 진행시키지를 않나, 마지막 컷에서 뭔가 굉장한 게 다음 화에 나올 것처럼 연출 해놓고서 정작 다음 화에서는 “막컷이라 그냥 해봤어”라고 하지를 않나 하는 식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캐릭터들이 자신들이 속한 ‘소년만화’라는 장르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 메타발언에 의해 독자는 이 만화로부터 빠져나오게 된다
이 작품에서 메타발언은 대부분 작가가 공들여 설명해야할 부분을 캐릭터가 직접 작품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때워버리는 식으로 사용된다. 하긴, 연재 종료를 오늘 내일 하는 만환데 몇 달치 분량을 한 컷 만에 뽑아먹는게 무슨 대수일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런데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캐릭터의 입을 빌려 말하는데, 벌써 전부 말해놓고 “아차 말해버렸네”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캐릭터가 작가의 말을 대신 했지만, 캐릭터가 말했기 때문에 작가는 말을 하지 않은 셈이다.
이러한 ‘아닌 척’ 전략을 통해 유독 김규삼이 꾸준하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수위조절, 검열에 대한 이야기다. ‘가슴가’ 에피소드에서 주인공들이 부당한 검열에 대해 저항하고 결국 “나는 가슴이 좋다!”로 끝난다든가, 데미와 오오라의 입을 통해 소년만화의 법칙은 “꿈, 우정, 사랑, 눈물, 노력, 서비스컷”이라고 말하며 여자 캐릭터들이 노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설파한다든가(물론 비꼬는 동시에 반사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심의의 탑을 등장시켜 여자 캐릭터의 노출과 서비스 컷으로 웹툰 차트 역주행을 꿈꾸는 븟새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그렇다.
▲ 가슴가를 처단하려면 가슴가를 외쳐야 하기 때문에 가슴가를 처단할 수 없다
만화에서 가슴이 등장하지 않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캐릭터들이 가슴이 등장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독자들에게 설명을 하는 방법이 첫 번째, 두 번째는 만화가가 안 그려버리는 방법이 두 번째다.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김규삼은 의도적으로 메타발언을 통해서 독자가 작품을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 작가의 존재를 경유하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음으로서 독자는 ‘가슴가’ 에피소드나, ‘슴버프’를 둘러싼 데미와 영진의 행동 등에서 ‘가슴’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작가의 의도를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작가가 이 만화의 진정한 주제를 ‘검열’로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중에 갖다 붙인 사후 포장에 가까워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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