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툰 책임이란 무엇인가? «아이들은 즐겁다» 무료웹툰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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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5파6의 «아이들은 즐겁다» 는 아주 독특한 작품이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지도 않고, 줄거리의 인과관계도 뚜렷하지 않다. 에피소드들은 옴니버스에 가까우며 등장인물의 내면묘사도 극도로 자제되어있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다만 다이가 처해있는 상황과 조건, 그리고 일상적으로 겪는 일들의 나열 뿐이다. 즉, 작품의 내적 완결성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떻게 작품으로서 성립하는가? 그것은 이 작품의 독자를 상황에 대한 관찰자로 상정하고, 이 상황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독자에게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가정을 통해서 성립한다. 독자는 서술된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비로소 이 작품은 작품으로서 성립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어떤 감정을 갖게 될 것인가? 나는 ‘책임’이라는 감정으로 이 작품과 독자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아이들은 즐겁다»는 주인공인 8살 ‘다이’가 초등학교 입학부터 어머니의 사망까지의 짧은 기간동안 다이가 경험한 일들을 3인칭 시점에서 담담하게 서술해 나간다. 작품 상의 시간은 아마도 6개월 남짓, 그러니까 3월 입학에서부터 방학이 끝나고 얼마 뒤인 9월 혹은 10월 정도까지의 시간을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이 6개월 남짓의 시간 동안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주며, 그 서술은 다소 건조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인물의 내면 묘사를 자제하는 특징을 보인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다이가 경험하는 일상들의 나열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 역시 대단히 극적인 것은 아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는 일, 운동회나 소풍 때 있었던 일, 친구들과 놀러간 일, 아픈 어머니의 병원에 찾아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 아버지를 기다리다 잠드는 일 등 평범한 소재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평범함’은 다이의 일상이라는 이야기 자체보다는 다이가 처해있는 조건에 독자들이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이다.
사실 다이가 처해있는 조건은 평범한 조건이 아니다. 다이 부모의 결혼이 사랑에 기반해있다고 보기도 어려운데다, 같이 사는 동안 자주 싸웠고 이후 어머니의 병으로 함께 살 수조차 없게 되며 아버지의 직업도 일정치 않다.
하지만 다이는 이러한 평범하지 않은 조건에서 평범하게 산다. 이러한 부조화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며 이 부조화의 인지를 통해 독자들은 특정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특정한 감정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안타까움’이라거나 ‘미안함’이 아닌 ‘책임’을 거론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타까움 혹은 미안함이 순간적인 감정이라면, 책임은 그 순간적인 감정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윤리적 태도이다. 책임은 단지 내가 한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책임은 ‘인과관계의 인정’에 가깝다. 내가 내 앞에 벌어진 사태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곧 세계-내-존재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인데, 다시 말해 타인과 관계맺고 있는 존재로서의 나 자신이 그 관계에서 최선을 다했는지, 또 정말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인지 혹은 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성찰인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그러한 고통은 나 자신이 처해있는 조건때문이기도 하고 나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나 자신이 처해있는 조건에 대하여 아쉬워하거나 화를 내거나 원망하거나 성찰해본 적이 있다. 그런 독자들이 다이가 처해있는 상황과 조건을 목도하게 될 때,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독자들 자신과 다이를 동일시하게 되며, 나아가 다이가 처해있는 조건이 나아지지 않음에 대해 안타까워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를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마땅한가?’라는 윤리적 성찰에 이르게 하고, 그러한 윤리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태도가 바로 ‘책임’, 즉 세계-내-존재로서 타자와 세계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함이 마땅한가에 대해 자기성찰하는 태도로서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작품 내 어른들의 행동이 전형적으로 묘사되었다는 것 역시 독자에게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작품에서 ‘작은엄마’의 행동은 작은엄마가 악한 인간이어서 하는 행동은 아니다. 작은아빠의 빈말이나 아버지의 무신경, 시아엄마의 태도 역시 그들이 악한 인간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한계 - 각자의 사정 - 안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객관화하여 보는 독자들은 적어도 그보다는 더 잘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혹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판단은 ‘무엇이 옳은 행동인가?’ 혹은 ‘무엇이 더 나은 행동인가?’에 대한 질문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즐겁다»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극의 완성도를 통한 카타르시스도 예술적 완성도를 통한 보는 즐거움도 의도하지 않는다.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는 그 부분이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이며, 하나의 ‘작품’으로서 생명력을 갖도록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이 그러한 작품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름대로의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더욱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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