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툰 [스포주의] 섬세한 감정선, 힘 있는 문장 - "해피버스데이" 무료웹툰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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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것도, 알아서 기는 것도, 쓰레기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것도 익숙했던 나. 그런 나와는 완벽하게 달랐던 한없이 반짝거리던 너.
산호야 나는… 왜 그때 네가 눈을 감았는지 묻고 싶어. 너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섬세한 감정선과 힘 있는 문장이 압권인 [소라의 눈]의 썸머 작가의 대표작.
<해피버스데이>는 BL로 장르가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이 작품은 동성 간의 사랑, 그보다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자신에게 있어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지에 대한 것들이 더 섬세하게 표현 되어 있다고 본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세 명이다. 앞서 작품설명에 나온 것처럼 심하게 왕따를 당하는 ‘김병신’, 그런 그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어주던 ‘이산호’, 그리고 산호의 소꿉친구이자 연인인 ‘이지호’.
작중 ‘김병신’은 그를 괴롭히는 주동자에 의해 불리게 된 이름이라 초반에도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림도 사람의 모습이 아닌 덩어리로 표현되는데, 이 부분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보다 보면 ‘김병신’은 후에 본명으로도 불리고, 제대로 된 사람으로도 나타나는데 이는 어쩌면 체념하고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이 어떤 계기에 의해 주변의 감정들을 조금씩 받아들임으로써 그 형태가 갖추어지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어떤 계기로 변화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산호의 죽음이다. 산호는 동급생에 의해 한밤 중 골목에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다. 김병신이 전교적으로 왕따를 당하던 저에게 다가와 말도 걸고, 빵도 나눠주고 사람 대 사람으로 바라봐주던 산호를 사랑한다고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였다. 산호의 죽음은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무기력하게 지내던 김병신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곧장 산호를 죽인 범인을 찾아가 칼로 찌르고 소년원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몇 년 후 산호의 연인이었던 이지호를 만나게 된다.
이야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산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되고 주인공들의 감정을 드러내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앞의 2회까지만 등장하고 이후부터는 김병신과 이지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그려진다. 산호를 사랑하는 사람들. 잃은 것과 남겨진 것들. 이지호는 출소한 김병신을 자꾸 찾아간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산호를 그리워하고, 추억하고, 여전히 사랑한다. 그리고는 산호의 죽음으로 흐려진 자신들의 인생을, 남겨진 자들끼리 채워간다.
“ 산호야, 나 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너는 내게 너무 눈부신 사람이야.
내가 먼지라면 너는 중력이야. 나는 형태 없이 부유하고 너는 내가 만난 최초의 인력이야. ”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까지 기억 되는 존재를 만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말을 통해 김병신에게 있어 산호가 얼마나 눈부신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산호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정의롭다거나 정말 빛이 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김병신과 이지호에게 있어 산호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너무나도 눈부셔서 사랑할 수밖에 없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 그가 죽은 후에도 산호는 사랑 받고 기억된다. 한 번이라도 전하고 싶어서 좋아한다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을 연습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하지 못한 마음은 얼마나 산산히 부서지고 무너져 내렸을지. 그 모든 걸 뛰어 넘어 그저 산호의 존재만으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호의 죽음 이후, 삶이 무기력해지고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이지호는 김병신과 만나면서 닫혀 왔던 마음을 서서히 열게 된다. 김병신 또한 이지호와 산호의 누나, 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살아 있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두 사람은 산호라는, 지울 수 없는 공통점을 통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 나간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버티는 원동력이 되어주면서, 떠난 자를 추억하고 남겨진 자들끼리 어깨를 두드리며 웃을 수 있는 나날을. 지호에게 김병신의 말 한마디는 스스로를 용서하게 되는 시작점이었을 거다. 산호가 죽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의 부재 속에서 시달려온 고통의 짐들을 덜어내는 시작점.
그리고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이겠지. 제가 한 말을 산호의 누나에게 똑같이 돌려받고서 김병신은 울었다. 산호를 죽인 자를 살해하고 소년원에 갈 때도, 출소하고 나서 산호와 똑같이 생긴 누나를 만났을 때도 운 적이 없던 그가,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마음을 흘려보내기라도 하듯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서로가 위로해주고 이해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해피버스데이>는 앞서 말했듯 딱히 BL의 L을 찾기는 조금 힘들다. 그러나 오히려 그 부분이 더 이 작품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산호가 지호와 사귄다는 것을 알았을 때, 김병신이 산호에게 호모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산호는 이렇게 대답한다.
“ 그냥 지호를 선택한 거지. 남자랑 여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걔냐, 아니면 다른 애냐…의 문제랄까. ”
이 한 마디에 작가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게 담겨져 있지 않나 싶다. 그냥 사랑하니까 선택하는 거다. 그랬기에 김병신도 산호를 사랑했고, 산호와 지호도 서로를 사랑했다. 산호가 죽었음에도 그들은 그를 사랑했고 여전히 기억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들의 비애와 남겨진 자들의 삶. 어떻게 보면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소재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인공들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에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하고 말하는 부분에서 울컥했는데, 그 말 한마디로 주인공들의 아픔도, 슬픔도 조금씩은 덜어낸 것 같아서 묘하게 마음이 찡했다. 썸머 작가 특유의 아련한 분위기와 섬세한 감정표현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처음에는 이 작품이 제대로 이해가 되질 않았었다. 14화로 끝나는 짧다면 짧은 단편인 만큼 담아내는 이야기의 전개가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 번 읽고, 두 번 읽다 보니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작은 감정들과 주인공의 마음들이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되었다. 그제서야 이 작품에 서서히 빠져들 듯 몰입할 수 있었는데, 돌려 보면 이마저도 작가의 능력이 아닌가 싶다. 경쾌하고 밝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야기 밑에 깔린 주인공들의 슬프고 애달픈 마음들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강렬한 BL을 원한다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잔잔하고 고요한 감정들을 느끼고 싶다면 충분히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비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본다면, 절로 그들과 동화되어 멀리 돌고 돈 끝에 찾아낸 안식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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