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툰 «소녀의 세계» - 자신을 차별하는 자기인식의 폭력성에 대해 무료웹툰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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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현재 청소년 집단에 지배적인 담론은 계층 담론인 듯 하다. IMF 이후 불어닥친 한국 사회의 대대적 변화는 청소년들이 공유하는 정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청소년들은 균질한 집단이 아니며, 청소년 스스로도 자신들을 균질한 집단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밖에서 그들을 판단하는 경우보다도 훨씬 더 세세하게 스스로를 구분한다. 물론 청소년 집단의 특징 중 하나가 ‘소속감’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고, 따라서 청소년들이 각자 친한 친구들과 모여 일종의 ‘그룹’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는 파괴된 지 오래고, 학교-학원 외 생활 (정확히는 입시와 연관되지 않은 생활) 이 전무한 지금, 청소년들의 ‘그룹’을 구분하는 요소는 ‘어떤 지위를 어느 정도 차지했는가’ 여부가 되었다. 더 잘 생김, 더 공부를 잘 함, 집에 더 돈이 많음, 운동을 더 잘 함 등, 그들이 ‘소유’한 그 어떤 것을 기준으로 ‘우수’한 집단 - ‘평범’한 집단 - ‘열등’한 집단이 형성되고 청소년들은 거기에 자신을 구겨넣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계서열화시키는 것, 위계서열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현재 청소년 집단에 지배적인 담론이라는 것이다.
모랑지 작가의 «소녀의 세계»의 설정과 이야기는 그 단적인 사례이다. 주인공 오나리는 스스로를 뚱뚱하다 여겼고 예쁘지 않다 여겼던 소위 ‘평범한’ 여성 청소년이다. 작 중 오나리의 당면 과제는 고등학교 생활을 무난하게 치르는 것. 이를 위해 주인공이 ‘다이어트’를 택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이 자신을 열등하다고, 혹은 부족하다고 자기인식하지 않았다면, 주인공은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자기인식이 타자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지는 한, 자기극복 역시 타자의 인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인정의 기준이 ‘외적 - 획일적 미美’라는 점과, 극복 방법 역시 폭력적 ・ 미시적이며 문화자본의 영향 하에 있는 ‘다이어트’라는 것이, 특히 그 선택이 독자에게 있어 충분한 ‘개연성’을 가진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 청소년의 자기 차별하는 자기 서사. 그것이 내포하는 현실의 폭력성.
작가가 그것을 일컬어 ‘소녀’의 세계라고 선언한 것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는 이러한 자기인식의 계층화 ・ 위계서열화가 여성에게 더 고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여성에게 더 많은 ‘규정’이 주어진다고 파악하는 것이 옳다. 즉, 계층의 위계서열을 규정하는 요소가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더 많다는 것이다. 더 예쁠 것, 더 날씬할 것, 더 잘 입을 것, 더 공부를 잘 할 것, 그 자기를 가꿀 것, 더 능력이 있을 것, 더 합리적일 것, 더 돈이 많을 것 등등. 남성과 여성에 똑같이 적용되는 계층 구분 요소에 더해, 여성에게는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계층 구분 요소가 추가된다. 스스로를 ‘계층’에 속한 인간으로서 자기인식할 때, 그 계층을 구분하는 요소가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것은 그 개인이 더 복잡하고 다양한 타자의 인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세계는 ‘소녀’의 세계라기보다, ‘여성’ ‘청소년’의 세계이다. ‘청소년’의 세계 안에서도 ‘여성’의 세계에는 더 많은 ‘구분짓기’의 계기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잘 만든 재미있는’ 작품이다. ‘완벽하지만 외로운 백조’와 ‘맘씨 착한 오리’라는 캐릭터 설정은 캐릭터 변주만으로도 여러 에피소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 플롯은 뚜렷하며 깔끔한 작화에 세련된 개그 센스도 종종 보여준다. 독자를 긴장시킬 때와 이완시킬 때를 잘 구분하며, 표현할 것과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것만 언급하기에는, 작품이 재현하는 청소년의 모습이 의미심장하기 이를 데 없다. 주인공 오나리의 자기서사는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차별’하는, 차별적 자기인식의 폭력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혹은 청소년기를 보내온 청년들이 여기에 ‘공감’한다는 것은, 그 차별적 자기인식이 현재 청소년층에 지배적 인식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나리가 마침내 차별적 자기인식을 넘어서서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이르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인정, 그리고 존중을 이뤄내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스스로가 차별하는 너무도 가슴아픈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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