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툰 내맘대로 특집 - 고아라 작가 편 : 6. «파도를 걷는 소녀» 무료웹툰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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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야에서 오래,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은 누구나 한 번씩 전환의 계기를 필요로 하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껴서일 수도 있고, 매너리즘에 빠져서일 수도 있으며, 다른 세계에 대한 확장의 욕구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지쳐서일 수도 있다.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그러한 시기는 오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그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어서와»부터 «어떤 교집합»에 이르기까지, 일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로부터 오는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는 작품을 주로 그려왔던 고아라 작가는 최근작 «파도를 걷는 소녀»에서 처음으로 스토리 작가와의 협업을 시도한다. 물론 작가는 «어떤 교집합» 이후 «청소년 영화» 뿐 아니라 현재는 서비스가 중단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산책»에서 미스터리 드라마를 시도한 바 있다. 나는 그것이 적어도 «청소년 영화»에 와서는 일정 수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지만, 작가 스스로 밝혔듯 고아라 작가는 이 시기에 슬럼프에 빠졌던 듯 하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파도를 걷는 소녀»를 통해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손으로 변주해 내는 것을 선택했다.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소재인 ‘서핑’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의 스토리 작가는,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정유미의 «연애놀이» (http://m.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2414212)의 에디터이자 서핑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한나우 작가이다. 한나우 작가의 스토리는 분명 고아라 작가의 스토리와는 달라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요소들을 여럿 가지고 있다. 한 개인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로서의 서핑, 한 여성을 향한 두 남자의 애정, 인생에 대한 겸손함과 교훈 등, 독자가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들을 내세워 작품을 이끌어 나간다. 플롯 구성 역시 마찬가지로, 시간 순에 따른 선형적 전개에 이따금씩 회상 장면을 통해 주인공인 ‘우디’를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분명 작품을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작가의 의도이다.
그러한 의도는 고아라 작가의 그림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전 작품에서 일관되게 보였던 선이 적고 채도가 높은 작화와는 달리, «파도를 걷는 소녀»에서 고아라 작가는 선이 많은 스케치에 채도를 낮추고 명도를 높인 컬러를 사용했다. 채도가 낮다는 것은 원색 사용을 자제해 눈이 편안하다는 것이고, 명도가 높다는 것은 작품의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밝은 톤으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또한 평면적인 컷 연출이 특징적이었던 이전 작들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적극적인 원근법 사용과 입체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컷 연출을 선보이고 있다. 소설에서 ‘지문’에 해당하는 것이 만화에서는 ‘작화’이기 때문에(물론 시각예술 그 자체로서 가지는 고유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작화는 만화의 전체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스토리 및 작화의 이러한 경향으로 볼 때, 작가들은 이 작품이 보다 대중적으로 읽히기를 희망한 것으로 보인다.

▲ 직전작 «청소년 영화». 어두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채도 높은 컬러를 보여주며, 상대적으로 단순한 선과 평면적 연출을 보여준다.

▲ «파도를 걷는 소녀» 대표 이미지. 고아라 작가는 이러한 스타일의 작화를 작품 내내 선보인다.
문제는 이것이 고아라 작가가 유지해 왔던 스타일과 너무 많이 달라서 마치 이것이 고아라 작가의 작품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작화의 경우는 얼마든지 최근 조류에 맞게 그 방식을 다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아라 작가 스스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작화 방식을 선보이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내용이다. 이 작품은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설정과 표현이 오래된 클리셰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매력적인 여성과 그 여성을 두고 경쟁하는 역시 매력적인 두 남성,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성장과 결실을 돕는 주변인물들’이라는 설정은 진부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고아라 작가 고유의 강점이었던 ‘일상의 포착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보편적 정서’는 어떤 컷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청소년 영화»처럼 명확한 주제의식이나 드라마틱한 플롯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금수저’ 캐릭터로 드러나는 ‘현재’가 불량한 서퍼들의 시비라는 뻔한 위기에서 주인공 ‘우디’를 구해내고, 그런 현재의 등을 우디가 바라보는 연출은 남성 중심적 클리셰의 진부한 답습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고아라 작가가 «어떤 교집합»까지 선보인, 보편적 정서를 표현하는 작품들 뿐만 아니라 미스터리 드라마를 시도했던 «청소년 영화»에서도 연속적인 컷 연출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고아라 작가는 불필요한 연출은 최대한 자제하고 하나하나의 컷마다 의미를 담는 방식의 연출을 고수해 왔다. 그런 작가가 어느 인물의 행동을 연속적으로 묘사했다면, 그러한 연출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는 뜻이었겠으나, 일련의 연속적 컷 연출에서 보여지는 바는 그저 통속적인 ‘멋짐’ 이다. (18화에서 진우와 현재가 파도를 타는 장면은 무려 열 한 컷에 걸쳐 묘사되었다. 이 장면이 소설에서 글로 설명되었다고 생각해보라!)





▲ 문제의 연출. 지면 관계로 열 한 컷을 다 실을 수 없을 정도이다.
우디가 패들링을 시도하다 지쳐 가쁜 숨을 몰아대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어째서 네 컷에 걸쳐 표현해야만 했는가? 서핑하는 인물의 연속 동작을 그렇게 자세히 묘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이 만화는 서핑을 강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만일 «파도를 걷는 소녀»가 출판 만화였다면 어땠겠는가? 잡지 연재를 전제로 하는 출판 만화에서 불필요한 연출은 연재 속도를 늦추고 출판 비용의 상승을 불러오며, 이는 스토리 작가 및 그림 작가, 나아가 편집자와 출판사 모두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문제이다. 웹툰이 출판만화에서는 할 수 없었던 다양한 연출을 가능하게 했다고 해서, 그것이 안이한 연출까지 용납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 이 연출이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고아라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는 부분은 오히려 우디가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이때 고아라 작가는 압축적인 이야기 전개를 통해 우디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심지어 한 회상씬 안에서도 이야기의 교차 전개, 즉 퍼즐식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회상 씬에 대해서는 그 이야기 구성을 고아라 작가가 전담했다고 추측되는 부분이다.
오해는 말아달라. 나는 모든 만화 작품이 작가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진부하든 신선하든) 클리셰를 활용한 통속적 작품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작품의 이야기에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만화가가 필요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고아라 작가는 (그 완성도 혹은 성숙도에 관계 없이) 분명 작가주의를 지향한다. «어서와»에서 엿보인 ‘인디’ 작가의 가능성은 이후 여러 작품을 거치면서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법으로 담아내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점차 구현되어 왔다. 설령 그것이 두루 읽히는 대중적인 스타일이 아니어도,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조금은 곤란하여도, 작화 과정이 고되고 번거로워도,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자 방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것을, 다시 말해 작가주의 예술가가 작가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작가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다루지 못하는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고, 대중적 작품을 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작가를 강렬히 원하는 누군가가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작가 본인이 표현력의 한계를 극복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고아라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 던진 질문에 대해 아직 그 답을 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고아라 작가는 «파도를 걷는 소녀» 시즌 1 종료와 함께 작품에서 하차하게 되었다. 작가는 그 이유로 “기질 차이로 인한 문제가 있었으며 그것이 절충되지 않았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는 팬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작가의 작품을 향유하는 독자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분명 독자에게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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