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툰 공감만으로 충분한가 - 공감 무료웹툰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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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성의를 논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타인인 이상 누구도 이 성의에 대해서 논할 수는 없다. 어쩌면 생길지도 모르는 선의의 피해자를 위해서다. 작가는 정말 열심히 그렸는 데 단순히 역량이 모자라서 생긴 미스를 성의가 없다고 매도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모르니까. 아무리 확실해 보여도 혹시, 모르니까.
때때로 남에 대한 배려가 불편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내가 하고싶은 말에 족쇄를 채우는 그 미지의 피해자 때문에 함부로 말을 해선 안된다는 사실이 불편해질 때가 있다. 어떤 작품을 '쓰레기'라고 매도하는 사람은 그 작품이 아무리 보잘것 없더라도 팬들의 질타를 감내해야 한다. 특히 개그 만화에 대해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비판보다 조심스럽다. 왜냐면 누군가는 재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재밌기 때문에 '재미없다'가 비판문의 주된 요소가 되어선 안된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재미를 매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가끔 내게 격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유난히도 날씨가 좋은 새벽녘에 <공감>이 드디어 네이버 연재를 시작했단 소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술 먹고 우리집 문을 두드려대는 옆집 아저씨의 멱살을 잡는 것 만큼이나 비도덕적인 상상을 했다. 지면에 대고 욕을 해선 안 되겠지. 그러나 무엇인가 이야기는 꺼내고 싶다. 하지만 누군가는 재밌어하기 때문에 난 그래선 안 된다. 이는 독자의 수준을 운운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이를 분명히 해두고 싶다. 남에게 이야기할 때 당연히 지켜야 할 에티켓이, 나름대로 공적인 글을 올릴 때 지켜야 할 에티켓이 오늘따라 불편하게 다가온다는 이야기다. 사회에 불만이 많은 날엔 누구나 한 번 쯤 남들 신경 안쓰고 소리를 질러보고 싶지 않던가. <공감>은 이런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래선 안된다. 그러니 객관적인 척을 하자. 자기 암시를 걸고 담담하게 서두를 적는 것이다. 이 만화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이 작품의 주 타겟층이 누구인지도 이해가 되지만, 나는 이 작품을 좋은 개그 만화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그림을 못그려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림은 못 그릴 수 있다. 웹툰이니까 못 그려도 되는 건 아니지만 만화가가 그림을 못 그릴 순 있다. 성의가 없어보여도, 정말 최선을 다한 그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만화의 그림이 작가의 개성을 분명히 담고 있느냐 생각해 보자면, <공감>은 못그린 축에 속한다. 그림을 못그렸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이 만화는 못그렸다. 독자의 경험이 작품의 배경을 대신한다. 작가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종이 인형을 늘어놓은 채 이곳이 교실이라는 것만 설명한다.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킬 모든 감정 표현을 작가는 유명 인물의 표정을 그대로 따라 그린 컷으로 대체한다. 만화에서 그림은 단순히 장소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다. 교실의 분위기, 주인공의 긴장감, 표정. 이런 것들이 이야기와 더불어서 만화를 완성시킨다. 여기서 분위기를 위한 묘사 자체를 배제하고, 주인공의 긴장어린 표정을 다른 사람의 표정을 따라 그려서 대체한다면. <공감>이 만화여야 할 의미도 이유도 없다.
제목부터 <공감>인 만큼 작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공감을 가질만한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림체의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다 알거라 생각하는 소재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작품에 독이 된다. 대학교 생활 같이, 특정 독자가 알수없는 이야기를 꺼내들 때부터 작품은 공감의 영역에서 저만치 벗어난다. 새하얀 백지의 배경은 이 때 독자에게 더욱 거리감을 가져다 준다. 의외로 전세대가 공유하는 소재는 그리 많지 않다. 작가가 매년 유년기를 체험하지 않는 한 어린 독자들에게 작품은 점점 먼 작품이 될 것이고, 작품의 수명은 패러디 개그에 의존하는 개그물 만큼 빨리 시들게 된다. 이게 내가 이 만화를 좋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두번째 이유다. 전세대가 아우르는 공감은 너무 폭이 넓다. 특정 타겟층을 노리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소재에 따라서 다른 독자층을 소외시킬 우려가 있다. 파괴왕 콘테스트 연재분인 대학 과제 편에서, 작가는 이미 이 역효과를 체험했다. 이런 식으로 소외되는 독자층이 나올 때마다 작품은 한 번씩 실패를 겪는 셈이다.
연재 매체의 의사는 존중한다. 이런 작품은 화제를 모으기 좋다. 천리마 뼈다귀의 고사를 알고 있는가. 좋은 말을 구하고 싶던 왕이 신하에게 조언을 구하자 신하는 답한다. "우선 천리마의 뼈를 비싼 값에 사면, 살아있는 천리마는 그럼 얼마에 사겠느냐는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몰릴 것입니다." 이 작품이 천리마 뼈다귀인지 그냥 말뼈인지 판단하는 건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뼈 감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백골이 보이는 만큼, 이미 묻어줘야 될 낡은 소재라는 것 정도다. 그러니 난 작품을 비판하겠다. 그림을 못그려도 좋다. 소재가 좀 낡아도 좋다. 작가가 초보여도 좋다. 그렇지만 이 만화는 못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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