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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툰 «자살캣» - 이질성도 존중받을 수 있기를 무료웹툰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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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9회 작성일 24-05-2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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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양갱 작가의 «자살캣»을 보고, 저는 알 수 없는 불만과 찝찝함에 휩싸였습니다. 그것은 리뷰를 완성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유는 알 수 있었습니다. 작가와의 합의 불가능성, 그것이 제 기분의 정체였습니다.


    먼저 «자살캣»의 세계관에 대해 살펴보죠. 인간이 없는 고양이들의 세계는 삶이 배척되고 죽음이 숭상받는 세계입니다. 그 이유는 고양이의 목숨이 아홉 개라는 것. 아홉 개나 되는 삶은 고양이들로 하여금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고양이들에게도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은 고통스럽고 두려운 어떤 것이기에, 게다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과 공포를 아홉 번이나 견뎌내야 하기에, ‘자살’이라는 행위는 고양이들에게 있어 숭고한 가치를 갖습니다. 목숨은 흔하고 자살은 어려우니, 자살이라는 것은 최선을 다해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 되죠. 애써서 추구하고 획득해야 하는 ‘죽음’에 비해, ‘삶’은 무가치한 그 무엇이 됩니다. 삶은 죽음을 위해 있고, 고양이들은 잘 죽기 위해 삽니다. 즉, 고양이들에게 있어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자살은 자신의 의지로 삶을 완성시키는 최고의 행동이기에 숭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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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없는 삶은 의지적 죽음인 자살로 완성됩니다.


    이러한 고양이들의 세계에도 이질적인 인물은 있습니다. 태어날 때 사고로 여덟 개의 목숨을 잃어 단 하나의 목숨만 갖고 태어나게 된 고양이 블루. 한 번의 죽음만으로 삶을 완성시킬 수 있기에 모든 고양이가 그를 부러워하지만, 정작 블루는 죽고싶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거나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삶 자체에 애착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고양이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만, 블루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죽으면 다시는 볼 수 없는데, 그것이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요? 모두가 죽음을 바라는 세계에서 홀로 삶을 바라는 블루는, 사랑하고 애착을 갖고 슬퍼한다는 이유로 이질적인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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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독자에게는 블루의 생각이 자연스럽습니다. 블루는 작품의 세계관 내에서만 이질적입니다.


    이제 이 이질적인 존재인 블루는 작품의 주인공인 점박이를 만납니다. 점박이는 평범한 인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질적인 인물도 아닙니다.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던 점박이는 어린 나이에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 실패와 고통은 트라우마로 남아 더 이상 자살을 시도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아홉 번의 죽음을 한 번에 가져다주는 ‘한방알약’만이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자살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점박이를 ‘고민하는 고양이’로 만들어주었죠. 적어도 점박이는 사회가 정해놓은 정답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직장을 구해 돈을 모아 한방알약을 사거나,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에 차근차근 자살해나가는 편이 좋다는 식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삶을 완성하겠다는 사촌동생 치즈의 생각을 지지하고 존중하죠. 점박이는, 고양이 사회의 무비판적 의견은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의 전제 자체(삶은 무가치하며 죽음은 숭고하다)를 부정할 정도로 이질적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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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박이는 블루의 이질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자살캣»의 세계관과 점박이 및 블루의 캐릭터는 무엇에 대한 은유일까요? 저는 그것이 작가의 자기고백과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세계관은 현실의 세계관을, 즉 삶은 가치있고 죽음은 무가치하다는 세계관을 역으로 도치시킨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작가가 직관적으로 발견한 이 세계의 본질적 측면이기도 합니다. 삶이야말로 무가치한 것이고, 죽음이야말로 그 달성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숭고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작가는 ‘아홉 개의 목숨’이라는 장치로 ‘흔한 목숨’에서 ‘삶의 무가치함’을 이끌어냅니다. 삶이 무가치하다는 것은, 삶에는 어떤 의미가 없고 죽음에는 그러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삶에 의미가 없으니 타인에게도 의미가 없고, 타인에게 의미가 없으니 그 죽음에도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삶의 무가치는 애착의 결여를 낳고, 상실에 따른 슬픔은 없는 감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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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이 아홉개라는 것은 작품의 장치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 앞에서 삶은 무가치하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애착도 사랑도 슬픔도 가지고 있는 블루는 이질적 존재가 됩니다. «자살캣»의 고양이들은 이질적 존재인 블루를 오직 ‘이상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블루의 입을 빌어 삶의 소중함을 말하려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블루의 주장은,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을 때 다른 여러 사람들이 작가에게 말해주었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목숨은 하나뿐이기에 중요하다는 것, 사는 건 물론 고통스럽지만 이대로 죽어도 그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 고통이 죽음으로 포장되는 것은 더 싫다는 것, 사랑하는 이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프다는 것. 이런 것들은 인간이 사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갖는 생각이지만, 동시에 뻔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겨우 이런 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나 문제적인 작품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살캣»의 세계관이 작가의 생각이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블루의 생각에 집약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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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의 주장은, ‘고통스러운 삶을 왜 사느냐’는 질문에 작가가 받은 여러 대답의 집약으로 보입니다.


    한편 블루의 이질성 그 자체는 작가 자신의 이질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다수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나, 전제부터 다른 이야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어려운 이질적인 나라는 특성을 블루의 캐릭터로 형상화했다는 것이죠. 만일 작가의 세계관을 블루의 입을 빌어 주장했다면, 그리고 다른 고양이들의 생각이 우리 인간의 생각과 같았다면, (인간에게 있어) 합리적인 세계에서 이질적 주장을 하는 이질적 존재인 블루의 주장은 독자에 대한 호소력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 비합리적인 세계에서 이질적 주장을 하는 이질적 존재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존재입니다. 마치 눈이 하나뿐인 사람들만 사는 세계에 떨어진, 두 개의 눈을 가진 사람처럼 말이죠. (합리성의 기준은 전제로부터의 연역이고, 그 전제는 ‘인간의’ 전제입니다.) 즉, 작가는 작품세계 내 이질적 존재의 합리성을 통해, 작품 자체의 이질성(=작가 자신의 이질성) 역시 독자의 사색에 따라 납득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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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의 주장은 독자에게는 합리적이지만 고양이에게는 비합리적입니다. 작가의 견해와 관계없이, 블루의 이질성은 작가의 이질성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점박이와 블루의 관계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점박이는 다른 고양이들과는 다른 생각, 즉 “부정을 긍정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 언명을 통해 작가는 “어떤 한 주관적 존재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타인이 아무리 그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한다고 해도, 그 주관적 존재에게는 끝까지 부정적인 것으로 남는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1화에서 점박이가 카오스의 자살을 돕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카오스는 자신의 이상한 털색을 증오합니다. 즉, 자신의 털색은 카오스에게 있어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점박이의 눈에 카오스의 털색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점박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카오스의 말대로 못생긴 털이라고 말합니다. 카오스의 자살을 도운 뒤에야 점박이는 말합니다. “이 칭찬마저도 당신에겐 상처일 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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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을 긍정으로 포장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작가가 생각하는 타자 존중의 핵심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점박이의 태도는 블루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점박이는 블루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절망 때문에 죽는 고양이는 없다고, 금붕어가 죽는 것이 왜 슬픈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점박이는 블루가 금붕어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도와줍니다. 점박이는 블루에게도 말합니다. “부정을 긍정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고. 그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자, 상대의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과 염려입니다. 물론 점박이도 처음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블루를 ‘파악’하려 하고 블루의 생각을 바꾸려고 합니다. 하지만 점박이는 24화에서 블루의 분노를 사 자살의 가능성을 차단당했음에도 슬프거나 두렵지 않고 그저 블루를 궁금해하기만 합니다. 작품의 주요인물인 시안의 경우와는 달랐던 것이죠. 시안은 블루를 친구라고 말하고 블루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고 말하며 블루를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안은 자신의 목적인 자살이 위협받게 되자 결국 블루를 자신의 목적 달성의 도구로 여겼음을 고백하고 맙니다. 블루는 시안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시안은 블루의 자살 여부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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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과 염려는 이질성을 뛰어넘습니다.


    비로소 블루는 점박이를 통해 자신의 ‘이상함’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블루는 자신의 이질성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떤 고양이도 하지 않는 생각. 어떤 고양이도 바라지 않는 것. 하지만 블루 자신은 생각하고 있고 바라고 있음이 확실하다는 것. 자기 존재의 이질성이 적어도 하나의 문제이기는 하다는 것을, 블루는 잘 알고 있습니다. 블루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이질성이 이질성 그대로 인정받는 것이었고, 그러한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타인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시안에게, 나중에는 점박이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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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질성도 존중받을 수 있기를, 작가는 블루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작품 전체를 해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1) 삶은 무가치하고 죽음은 숭고한 삶의 완성이라는 작가의 인식과, 2) 그렇게 인식하는 작가 자신이 현실 세계에서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 3) 그리고 그러한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해달라는 작가 자신의 요구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작품의 세계관 자체를 통해 작가 자신의 세계 인식을, 블루라는 캐릭터를 통해 작가 자신의 이질성을, 점박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작가 자신의 구체적인 사유의 결론(부정을 긍정으로 포장할 수 없다)과 자기 존재의 수용 요구(‘이상한’ 존재의 이상함을 인정)를 표현한 것입니다. 작가는 트위터에서 «자살캣»을 두고 ‘마음을 정리하는 만화’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이상하다고 지칭하면서, 동시에 이 이상한 것이 바로 나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 작가는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 합니다.



———

    리뷰의 끝에서, 저는 «자살캣»의 세계관이 지닌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너무나 ‘이상한’ 작품이었거든요. 제가 가진 전제와 작가가 가진 것으로 보이는 전제가 너무나 달라서, 대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싶은 것인지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고 나니 이내 그것이 그다지 의미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제’라는 것은, 그로부터 개인의 모든 의견과 근거가 도출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진 두 사람은 어느 지점에 가서 절대 합의할 수 없는 견해 차이에 도달하고 말죠. 삶의 무가치와 죽음의 숭고함은 작가의 직관적 인식입니다. 실존철학적으로 말하면, ‘세계를 인식하는 근본적 조건으로서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실존철학에서의 근본 감정은 ‘부조리’지만요. 게다가 작가는 그것이 이질적이라는 것을,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까지 합니다. “서로 존중할 수는 있으나 합의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그것은 틀렸다” 운운하는 것은, 작가와 작품을 ‘파악’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존중’하는 것은 명백히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어쩌면 작가가 다만 이질성만을 말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는 저의 오독 가능성입니다. 삶의 무가치와 죽음의 숭고함이라는 관념은 이질성을 강조하기 위한 작품 내 장치였을 뿐 작가의 생각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작품을 크게 오독한 것이 되겠지요. 사실 두 가지 생각이 여전히 제 머리 속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설마 정말로 작가가 삶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라는 의심과, ‘설마 가치의 상대주의라는 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무리한 세계관을 설정했을 것인가’라는 의심. 이 중에 저는 두 번째 의심을 따라 첫 번째 의심을 거두었습니다. 이 세상에 한 사람쯤, 정말로 삶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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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엔 삶이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작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해볼까 합니다.


    이제 작품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블루는 끝내 죽음을 바라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죽음을 거부하거나, 혹은 슬픔에 빠져 절망한 채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점박이는 한방알약을 얻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블루가 끝내 죽음을 바라지 않을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점박이는 끝내 죽음을 바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해석은 언제나 독자의 몫입니다. 다만 저는 말을 아끼고, 작가가 말하는 부정을 작가가 바라는 그대로 받아들여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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