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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ヒミズ)]
후루야 미노루(古谷実) | 코단샤(講談社) / 서울문화사 | 2001년 연재 시작 | 4권 완결
‘난 승부 따위 하지 않아…. 꿈이라는 링 위에 오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니 얻어터질 염려도 없지…. 나는 평생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니 제발! 누구도 내게 피해를 주지 마!’
– <두더지> 1권, 스미다의 독백
후루야 미노루의 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엽기개그 코드의 시발점으로 일컬어질 만큼 두터운 마니아층을 가진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성역 없는 개그는 이후 <크레이지 군단> <그린 힐>로 이어지며 후루야 미노루의 색깔을 각인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2001년 연재를 시작한 네 번째 장편작 <두더지>의 등장은 획기적으로 느껴졌다. 그동안 쌓아온 엽기개그 기반의 작풍을 버린 것도 모자라 염세적인 세계관을 선택한 것은 파격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파격은 일회로 그치지 않았으니. <두더지> 이후 <시가테라>, <심해어>, <낮비> 그리고 2012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사루티네스(サルチネス)>에 이르기까지, 후루야 미노루는 왕따,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등 폭력과 사회부적응자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듦으로써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 시발점이 된 <두더지>는 그의 만화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기운으로 청춘의 폐색을 그려낸 작품이다. 후루야 미노루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스미다의 짧은 생애를 통해 일본사회에 만연한 불온한 징후를 연이어 포착한다. 오늘날 <두더지>는 작가 후루야 미노루의 전환점일 뿐만 아니라 그의 색깔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의 작가가 아니다. <두더지>의 작가다.’s>’s>
중학교 3학년 스미다는 보통의 아이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일본에서 하루 평균 2천5백 명의 고귀한 목숨이 사라지지만 건강한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그럴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불행과 마찬가지로 행운도 그렇다. 스미다가 생각하기에 대단한 재능을 가진 자들은 초월자에 의해 선택받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자신을 특별한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보통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 그는 일평생을 헛된 꿈을 꾸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을 따름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 또한 어느 누구의 피해를 받지 않은 채 어머니의 보트가게를 물려받아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속에 숨어 살아가는 게 그의 유일한 바람이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내 마음 속에서 죽어버리면 웃을 수 있는 사람 1순위인 남자”인 아버지가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다의 아버지는 이따금씩 찾아와 돈을 뜯어가고, 야쿠자에게 진 빚마저 가족에게 전가시킨다. 어느 날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버리고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스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 맞서 지지 않으려 한다. 그저 내일부터 학교에는 못 가겠구나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여기는 일들을 반복해서 자문자답한다. 자신이 탄 비행기가 추락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노상강도를 당하거나 복권이 당첨될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그러나 “부모에게 버림받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이라는 질문에 그는 외칠 수밖에 없다. “젠장! 젠장! 젠장!”
이따금 스미다 앞에 나타나는 추한 괴물 모습을 한 환상은 스미다가 ‘보통’의 삶을 얻기 위해 맞서 싸우는 세상이나 환경을 형상화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스미다는 이제는 정말로 보트가게로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럼에도 자신을 비웃는 괴물에게만큼은 무릎 꿇지 않기 위해 그는 가까스로 보통의 삶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세상은 스미다가 지키려고 하는 보통의 삶마저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일견 허황돼 보이는 꿈을 꾸는 듯 보였던 만화가 지망생 키이치가 자신의 만화상 수상 소식을 알리기 위해 스미다를 찾아왔을 때, 스미다는 아버지의 빚을 받기 위해 찾아온 야쿠자에게 뺨을 베여 피를 흘리고 있다. 키이치의 부단한 노력이 마침내 성과를 얻은 순간, 피가 철철 흐르는 뺨을 수건으로 누른 채 병원으로 향하는, ‘보통’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스미다의 모습은 키이치의 성과와 잔인하리만큼 또렷하게 대비된다. “어쩌다 쓰레기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것뿐이야…. 그치만 난 쓰레기가 아니지. 내 미래는 누구도 바꿀 수 없어. 두고 봐. 난 반드시 훌륭한 어른이 될 거야!!”라고 다시금 다짐하지만, 스미다도 한낱 중학생일 뿐이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해도 결코 이겨낼 수 없을 만큼, 어린 스미다에게 세상은 가혹하기만 하다. <두더지>는 스미다를 통해 말한다. 한 인간의 신념에 가까운 각오, 그것도 ‘보통’이라 이름 지은 한없이 낮은 커트라인을 목표로 한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세상은 그렇게 잔인한 것이라고……. 인간이 만든 먹이사슬은 두더지에게조차 절대 피해가는 법이 없다.
“자기 자신이란 인간이 별 볼일 없을 뿐이지. 세상이 별 볼일 없다고 말하지 마. 큰 불행을 당해본 적도 없으면서. 자신은 불행하다고 한탄하지 마. 약자인 척 하지 마. 약자인 척해서 누군가가 지켜주기를 기대하거나 보살펴주기를 기대하지 마. 습관이 돼버리니까.” 그렇게 혼잣말을 되뇌지만 ‘꿈’이란 말과 맞물리는 순간 이윽고 스미다는 지고 만다. 아버지 때문에 인생은 엉망진창, 비참한 기분에 휩싸여있을 찰나, 그는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를 충동적으로 죽인다. 벽돌로 몇 번이고 머리를 내려친 후 사체를 보트가게 근처에 묻는다. 스미다의 보통의 삶은 드디어 끝나는 듯 보인다.
<두더지> 신장판(애장판). 일본에서만 발매되었으며, 전 4권이었던 것을 상, 하로 묶었다
이후 스미다는 1년을 한계로 정해놓고 새로운 일을 벌인다. 스스로 엄청난 신념을 갖고 살던 사람이 그 신념을 놓아버렸을 때, 삶 또한 순식간에 “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1년의 기한 동안 아무렇지 않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악인을 찾는 데 남아있는 자신의 덤 같은 삶을 바치기로 한다. 사람을 벌레처럼 죽이는 나쁜 놈을 자신의 목숨을 바쳐 먼저 죽여 버리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식칼을 들고 거리를 배회하며 악을 포착할 순간만을 노리는 스미다는 이후 온갖 크고 작은 악과 마주한다.
스미다가 밀어내는 데도 불구하고 늘 보트가게로 찾아와 그가 좋다며 그의 ‘보통’을 응원하는 치야자와가 있음에도 스미다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거리를 맴돈다. 그러나 기회는 쉽사리 닿지 않는다. 악은 뻔히 눈에 보이지만, 아쉽게도 언제나 그를 빗겨간다. 스미다는 자신이 악인으로 단정 지은 노가미를 뒤쫓기 시작해 녀석이 짝사랑하는 여자의 남자친구를 칼로 노리는 순간, 자신 또한 식칼을 들고 덤빈다. 하지만 경찰이 끼어들면서 죽이는 데는 실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미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쇼조는 스미다를 돕기 위해 사람을 죽여 천만 엔을 손에 넣는다. 또 스미다가 보트가게 직원으로 고용한, 사람 좋아 보이는 노숙자 츠카모토는 스미다의 눈에 띄지 않는 동안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성욕을 이리저리 발산한다. 이윽고 츠카모토는 스미다가 기대는 유일한 친구인 치야자와에게까지 손길을 뻗친다. 불행히도 츠카모토는 도망치고, 치야자와는 스미다를 위해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 입을 다문다. 언론에 보도된 살인자가 설날 신사를 찾은 인파 속에 있었다는 치야자와의 증언 역시 악인을 찾아 헤매는 스미다를 절망케 한다. 스미다가 악을 필요로 할 때 오히려 악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뒷걸음을 친다. 그렇게 스미다의 주변엔 언제나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고 온갖 범죄들이 횡행한다. 하지만 스미다의 칼에는 결코 닿지 않는다. 과연 괴물 모양의 환상이 나타나 그를 비웃을 만하다.
“무슨 일이 생기든 나라면 냉정하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지. 그 점만은 내가 남들보다 뛰어날걸. 예를 들어 지금 대지진이 일어나거나 차에 치어 발에서 뼈가 튀어나온다 해도 난 질질 짜는 짓 같은 거 안 해. 두려움에 떨지 않고 가장 올바른 행동을 취할 자신이 있다고.” 그런 것이 ‘보통’이라는 미래를 넣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며 회상하는 동안, 스미다는 더러운 옷을 입고 거리를 헤매다 놀이터 놀이기구 안에 몸을 웅크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것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창피한 헛소리”였다. 스미다는 발이 피범벅이 되도록 도시를 돌아다니지만 결국 잠정적 살인자와 맞닥뜨리는 데는 실패한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던져 망가지는 것조차 세상은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두더지>는 2012년 영화화 되었다. 감독은 <차가운 열대어>, <러브 익스포져>의 소노 시온.
이윽고 <두더지>는 후루야 미노루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선사한다. 그것은 하릴없는 인생의 틈바구니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뒤통수에서만 맴도는 악의 정체 때문이다. 마침내 스미다가 악인을 발견해 마음껏 칼질을 하는 장면, 또 경찰에게 자수를 약속한 채 치야자와와 마지막 밤을 보내며 떠올리는 ‘보통의 미래’는 곧 처참한 결말로 이어진다.
일본사회에 만연한 각종 강력범죄와 그 뒤틀린 욕망을 대상으로 삼은 <두더지>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바르게 살겠다는 소년 스미다의 소박한 목표를 무참히 짓밟는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야기 내내 스미다는 자신의 말에 자승자박당하고, 주어진 환경에 끊임없이 외면당한다. 게다가 비참한 청춘을 구원하려 하는 건 치야자와나 쇼조 같은 또래 아이들밖에는 없다. 후루야 미노루는 오로지 피식과 포식 관계로 만들어진 일방향의 먹이사슬을 스미다의 주변에 배치함으로써 비뚤어진 어른들의 세상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전작의 단순한 개그만화 그림체와는 다른 섬세한 실사체 그림으로 점점 더 잔인하고 사실적으로 세상을 묘사하는 후루야 미노루의 행보는 <두더지> 이후에도 한결같이 이어지고 있다.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살던 주인공들이 다시금 사회로 입수했을 때 벌어지는 가장 끔찍한 일들은 이상하게도 주인공의 눈에는 띄지 않고 한 다리 건너 주변을 맴돈다. 덕분에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며 또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다, 다만 의식하지 못할 뿐이라는 메시지는 더욱 뚜렷하게 다가온다. <두더지>가 그 어떤 만화보다도 아픈 만화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보통’조차 허락하지 않는 무서운 사회를 속속들이 해부하는 소년 스미다는 스스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몸을 들이밂으로써 절망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미다가 들여다본 그 깊고 깊은 절망에는 우리와 우리 사회의 치부와 상처가 뭉텅 묻어난다. 그것만으로도 <두더지>가 안내하는 절망의 심연은 반드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그 심연 또한 반드시 우리를 들여다볼 테니 말이다.
<출처: 에이코믹스 https://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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