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툰 고향의 꽃 - 심연을 들여다 보는 자는 무료웹툰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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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에서 우리가 마땅히 지키며 살아가는 법과 규칙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기반 위에서 유지되고 있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강제, 서로가 서로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암묵적 합의, 사회적으로 학습된 도덕과 질서 등이 그러한 기반이다. 한편 외부와 고립된 사회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비록 ‘바깥’ 의 관점에서 보면 터무니없을지 몰라도 말이다. 또 한 가지 차이점은 비교적 견고하게 지탱되는 국가라는 체제와 달리 작은 사회에서는 종종 아주 작은 변수에 의해 모든 관습과 규칙들이 무너지고는 한다.
‘고향의 꽃’ 에 등장하는 가상의 섬 ‘비화도’ 는 아주 전형적인 작은 사회이다. 이 섬에는 1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만이 살고 있을뿐더러 외부와의 연락도 몹시 까다롭다. 애당초 정상적인 이유로 만들어진 사회가 아니기도 하다.
비화도 출신의 형사 ‘장대한’ 은 같은 고향 출신의 용의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잠시 일을 쉬면서 고향에 다녀오기로 한다. 공교롭게도 비화도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질서’ 에 금이 가고 있었다. 장대한의 아버지 ‘장용두’ 의 무력과 권위에 지탱되던, 모래 위의 성과 같았던 사회가 무너지고 남은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뿐이다. 장대한이 도착했을 때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다.
어떤 특별한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 정글 같은 섬에서의 싸움답게, 섬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는 수단은 대체로 원시적인 폭력이다. 만화는 이를 강조하듯 칼과 주먹, 총, 목각이 난무하며 피와 상처, 시체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덕분에 이 만화는 네이버에서 19금 판정을 받았다)
장대한은 섬에서 가장 이질적인 사람이다. 물론 그는 이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섬의 현실을 모른 채 육지로 나갔다. 또 그는 현대 사회에서 원시적인 본능을 필요로 하는 몇 안 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고, 폭력에 익숙하지만 -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순식간에 끝나버렸을 것이다 - 그것은 마찬가지로 폭력을 제압하기 위한 제한적인 수단일 뿐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바깥’ 의 질서를 지키고 유지하는 자이다. 섬의 토박이들과 그들이 벌이는 잔인한 계획과는 가장 반대에 위치해 있다. 장대한과 섬사람들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싸움은 격렬하다. 만화는 굳이 이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수사(修辭)를 동원하거나 예의를 차리려고 하지도 않는다. 섬사람들의 본질이 그러하고, 장대한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싸워온 프로이기 때문이다. 피가 튀고, 사람이 죽고, 아수라장 속에서 과거의 추악했던 진실들이 밝혀진다.
작가가 의도했던 대로, 싸움 속에서 장대한은 정체성을 잃어간다. 그가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 기억을 잃었다거나 돈에 혹해 범죄에 가담했다는 시시한 결말은 물론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장대한은 폭력이 억압된 사회 속에서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조직의 일원이었지만 그러한 조직들 역시 제도적인 규제를 받는다.
그러나 섬에서 마주한 상황은 알량한 도덕은 물론이고 있지도 않은 법과 제도를 잊게 만든다. 단지 스스로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正當防衛)의 차원을 넘어서 섬사람들과 비슷해진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되기 마련이다. 현대 사회에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배려들이 있지만 비화도에는 그런 게 없다. 사건이 전개되고, 숨겨졌던 사실들이 하나둘 밝혀질수록 선악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장대한은 분명 자신을 잃고 원초적인 본능과 감정에 몸을 맡기지만 독자들은 쉬이 그를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장대한이 처한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고, 능력만 있다면 대부분의 평범한, 제도 속에서는 선량했을 (독자들을 포함해서)사람들 역시 똑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화는 장대한이라는 한 인물을 대상으로 질서와 무질서, 선함과 악함의 경계를 무너뜨리지만 독자들도 예외는 아닌 셈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인간의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묘사와 군더더기 없는 전개, 강렬한 충격요법을 동원한 주제의식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인물들 간의 격투에서 주도권이 바뀔 때 지나치게 뻔한 액션물의 클리셰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죽었거나 혹은 기절했던 것처럼 보였던 악당이 불쑥 일어나서 칼을 휘두르는 상황은 한두번이면 충분하다. 연출력의 부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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